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내슈빌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북군은 채터누가 전투에서의 승리로 채터누가를 통해 그동안 위협받지 않은 남부연방의 심장지대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채터누가 전역을 승리로 이끈 [[율리시스 S. 그랜트]]는 1864년 3월 2일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았고, 그랜트는 서부전선을 [[윌리엄 테쿰세 셔먼]]에게 맡겼다. 그랜트의 전략은 북군의 압도적 군세를 활용하여 남부연방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세로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랜트가 직접 조지 미드가 이끄는 포토맥군을 통제하며 버지니아에서 [[로버트 E. 리]]를 압박하는 동안, 북군 장군 나타니엘 뱅크스는 "레드 리버 전역"을 통해 루이지애나 서부 슈리브포트(Shreveport) 점령을 시도하고, 셔먼에게는 조세프 E. 존스턴 하 테네시군을 패퇴시키고 남부연방의 핵심 산업 허브도시였던 [[조지아주|조지아 주]] [[애틀랜타]]를[* 산업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철도가 통과하는 도시여서 군수물자의 수송에도 굉장히 중요한 도시였다.] 점령하며 조지아를 비롯한 남부 연방의 심장지대를 공격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수적 열세였던 남군은 유리한 지형에서 방어태세를 갖추고 북군을 맞아 싸우려 시도하였지만, 셔먼은 만반의 태세를 갖춘 남군에게 군대를 들이박는 짓 따위는 해줄 생각이 없었고, 그렇게 존스턴이 셔먼을 가로막으면서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찾아 군세를 주둔시키면 셔먼은 우회해서 애틀랜타쪽으로 진군하는, 쫓고 쫓는 추격전이 이어졌다. 존스턴은 테네시군의 온존을 최우선순위로 생각하여, 지는 싸움을 계속 피하면서 셔먼에게 자신보다 많은 출혈을 계속 강요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셔먼의 계속된 우회기동에 의해 존스턴은 1864년 5월부터 7월까지의 애틀랜타 전역에서 110 마일 이상에 달하는 산과 구릉이 많은, 수비하기 좋은 지형을 단 2달만에 내주었고 북군 군세는 애틀랜타에서 17마일 이내로 접근하게 되었다. 남부 연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비롯한 남부 연방 정부 인사들은 이러한 존스턴의 행각에 지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존스턴이 애틀랜타와 셔먼 사이의 마지막 자연적 방어선인 채터후치 강에서 후퇴하자 데이비스는 결국 인내심을 잃고 존스턴을 해임했으며,[* 이후 데이비스는 존스턴을 다시는 믿지 않았다. 1865년 1월 남부 연방 의회가 로버트 E. 리를 남군 총사령관으로 공식 임명하고 존스턴을 다시금 테네시군 사령관에 임명하는 안을 통과시키자, 데이비스는 리는 곧바로 임명했음에도 존스턴을 복귀시키는 것만큼은 한사코 거절한 나머지 부통령인 알렉산더 스티븐즈와 17명의 상원의원이 리에게 존스턴을 총사령관으로써의 권한을 이용해 테네시군 사령관직에 직접 임명하라고 제안했을 정도였다. 결국 리의 설득으로 존스턴을 임명하긴 했지만 데이비스는 "존스턴 장군이 지휘직을 가지는 것이 부적격하다는 내 의견은 (...) 강고한 확신으로 자리잡은 나머지, 야전 사령관으로써 그가 군을 지휘한다는 것에 다시는 자신을 가질 수 없을 정도이다." 라고 비망록에 적었다.] 공격적인 성향의 존 벨 후드를[* 후드는 리치먼드 정부로 계속해서 공식적인 방편이 아닌 사적인 편지를 통해 존스턴의 전략을 비판했다. 아마 치카무가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은 후 리치먼드에서 요양중에 제퍼슨 데이비스와 친교가 생긴 것이 이러한 상황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러 온 데이비스의 군사 고문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에게 후드는 자신은 계속해서 존스턴에게 계속해서 공격하기를 조언했지만, 존스턴은 그저 무모하다고만 여겼으며, 존스턴은 비효율적이고 싸울 의지도 없다며 깠다. 사실 후드 역시 존스턴 앞에서는 존스턴에게 후퇴를 조언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물론 실드를 치자면, 선임 군단장 윌리엄 하디조차 브래그에게 "현 상황이 계속된다면 한번도 제대로 전투를 치루지도 않은 채 애틀랜타까지 밀릴 것"이라며 불평했고, 다른 장군들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임시로 대장으로[* 하지만 이 승진은 남부 연방 의회가 동의해주질 않았고, 1865년 1월에는 다시 중장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승진시켜 테네시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존스턴의 해임은 "남북 양측을 통틀어 남북전쟁 중 가장 큰 실수"라고 역사가 브루스 캐튼에게 까였다.][* 당시 후드의 나이는 단 33세로, 양측을 통틀어 독립적으로 군대를 지휘한 장군 중 최연소였다.] 하지만 후드라고 해서 이미 상황이 이런 만큼 딱히 뾰족한 수가 있지는 않았고, 몇 번의 무위로 돌아간 공격 끝에 애틀랜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셔먼이 애틀랜타에서 재정비하는 동안, 후드는 제퍼슨 데이비스와 함께 셔먼을 공략할 전략을 세웠다. 그들의 계획은 채터누가에서 애틀랜타에 이르는 셔먼의 병참선을 습격하면서 앨러배마를 통해 중부 테네시로 북상하면, 셔먼은 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고, 유리한 지형을 잡아 셔먼을 박살낸 다음, 테네시와 켄터키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컴벌랜드 협곡을 통과해 피터스버그에 포위당해 있던 로버트 E. 리를 구원하러 가는 것이었다. 계획을 이행한 후드는 북군 병참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테네시로 북상했지만, 후드를 쫓는 것에 기가 질려버린 셔먼이 "바다로의 진군"을 실행하면서 후드를 쫓는 것을 포기하자 후드는 테네시에 분산되어 있던 북군을 섬멸하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삼는다. 셔먼은 바다로의 진군 직전 후방의 방어를 위해 조지 H. 토머스 및 일부 병력을 테네시로 파견했다. 전역의 시작 당시 후드의 총 병력은 토머스에 비해 1.5배 이상 열세였다. 하지만 테네시의 북군은 테네시 남부에 자리잡은 존 M. 스코필드[* 연방군 오하이오군(23군단) 사령관. 전후 전쟁장관과 연방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휘하 부대와 내슈빌에 주둔한 토머스 휘하로 양분되어 있었고, 만약 두 북군 부대의 합류를 저지하고 각개격파할 수 있다면 최후의 역전을 노려볼 수 있었다. 토머스가 군대를 생각 없이 분산시킨 것은 아니었고, 각지에서 출발한 북군 지원군이 철도 요충지 내슈빌로 집결할 때까지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코필드에게는 최대한 후드의 진격을 견제하며 시간을 끌면서도 병력은 최대한 온존하라는 임무가 내려졌다. 1864년 11월 29일 후드는 스프링 힐에서 존 스코필드 하의 북군 4군단과 23군단의 퇴로를 끊을 뻔 했으나, 명령이 전달되지 않아 남군은 퇴로 바로 앞에서 멈춰버렸고(...), 밤사이 남군이 자는 사이에 북군 군단은 남군 코앞에서 남군이 비워놓은 퇴로로 빠져나가버렸다(...). 격노한 후드는 군사회의를 열어 휘하 군단장들에게 화를 내고선, 하페스 강을 건너 스코필드가 내슈빌에서 토머스와 합류하기 전에 스코필드를 섬멸하려 시도한다.[* 직접 하페스 강을 건너 스코필드가 내슈빌로 가는 길 자체를 막는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도강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주변이 평지여서 자신의 기동이 노출되면 스코필드가 그냥 후퇴해버릴 것을 염려했다.] 하지만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기다리고 있는 스코필드 휘하 북군에게 돌격했다가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11월 30일 프랭클린 전투에서 대패하고, 스코필드는 강을 건너 내슈빌에서 토머스와 합류해버린다. 후드는 후퇴하면 탈영으로 군대가 와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 시점에서 이미 탈영으로 약 2천명을 잃은 상태였다. 비단 후드만이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전세가 기울고 특히 셔먼의 "바다로의 진군" 이후에는 가족들을 걱정한 탈영병들 때문에 남군 전체가 겪던 문제였다. 그 이후에는 그동안 한 명도 탈영병이 없음을 자랑하던 리의 북버지니아군도 골머리를 앓기 시작해서, [[제임스 롱스트리트|롱스트리트]]가 적정을 탐색하고 기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진 정찰병보다 탈영을 막기 위한 후방 병력을 더 많이 두어야 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기도 했다.] 지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남군이 후드에게 보낼 수 있는 지원군은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다.] 내슈빌로 진군하여 약 55,000여명에 달하는 토머스의 군을 상대하기로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